종상

과외 종상 (3차)

놀농4 2023. 5. 22. 01:44

https://twitter.com/smallfire06/status/1660227040656916483?s=20

 

트위터에서 즐기는 소불

“종상”

twitter.com

▲소불님의 종상 카톡썰을 보고 무단창작한 3차연성입니다(...)
 

<notice>

둘 다 농구 안 하고 공부만 합니다. 학원물 AU임 (갑타는 이미 학원물인데도... 그렇게됐다)
부모님들끼리 안다는 설정.
가볍게 적은 짧은 조각입니다~! ^^ 즐겁게 봐주세요!

 
 
 


 
 
 
 
"이번 시험에서 성적 떨어지면 제가 햄 애인입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도끼눈을 뜨고 봐도 낄낄거리며 형광펜을 죽죽 긋는 모습에 타격이라곤 보이지 않아 최종수의 미간 주름만 선명해지다 말았다. 최종수는 2학년 어린 후배의 과외를 봐주고 있다. 용돈이 부족하거나 자선사업을 하는 건 아니고, 엄마 친구 아들인 기상호랑 너무 오래 알고 지냈는데 최종수의 성적이 훨씬 좋았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이날 선물로 태양계 모형이 갖고 싶다던 모태 이과 기상호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굉장한 수학 점수를 받아왔다. 우주비행사 되려면 수학 과학 다 잘해야 할텐데~ 놀리듯이 웃는 아주머니를 보며 풀죽은 표정을 짓는데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 화근이었다. 가르쳐줄까? 최종수는 종종 과거로 돌아가 오지랖 부리는 과거의 자신을 짤짤 흔들고 싶었다. 사는 동네가 달라 학교 한 번 겹친 적 없는 타학교 후배를 금요일마다 만나 간식 약간과 과외 2시간을 맞바꿔주는 수지 타산 안 맞는 장사를 한지 어언 3년. 그동안 기상호는 저놈의 공약을 시도 때도 없이 내세워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성적 잘 나온단 말이에요."
"기분 나쁘니까 다른 걸로 해."
"이만한 게 없든데요, 완전 승리의 주문임."
 
 
그랬지. 기상호는 정말로 성적을 쭉쭉 올려왔다. 시험은 상대평가라는 명분으로 절대적인 점수가 아니라 등수로만 계산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모의고사는 백분율, 내신은 등수. 그러니 사설 모평이 불지옥 난이도로 나왔대도 해당이 없었다. 똑같은 등수여도 어떤 시험에선 97점이고 어떤 시험에선 92점이어서, 점수가 기준이었다면 노려볼만한데. 살뜰하게 상승 그래프를 타는 기상호의 성적표에 아주머니께서 갖고 싶은 건 뭐든 말해도 좋다며 좋아하셨지만 최종수는 내심 입안이 썼다.
 
이 멍청이를 좋아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원인은 명백히 기상호에게 있다.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중딩(2학년) 기상호가 갑작스레 선언했다. 햄, 내 이번 기말에서 성적 떨어지면 내가 햄 남친인 거예요. 이 황당한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이럴 일이 없었는데. 고1 최종수는 얼토당토않은 발언에 명백한 어이없음을 표했으나("내가 왜?") 시간이 지나고 보니 틈날 때마다 문제의 발언을 곱씹어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버렸다.
 
남친이란건 사귀겠단 거 아냐.
...기상호라면 괜찮을지도.
 
뒤늦게서야 중딩 최종수가 무슨 마음으로 수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던 건지 적나라한 깨달음이 밀려왔으나, 거기서부터 카운트를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오늘부터 좋아한 걸로 쳐버렸다. 어차피 어제까진 알지도 못했으니까 이게 맞아. 흥. 과외를 봐준 첫해, 기상호의 성적은 꽤 들쑥날쑥했다. 그러니까 이건 간접적인 고백이나 다름없는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지키라고 어쩔 수 없는 척 받아줄 수밖에 없지 않나 싶었다. 고등학생 최종수의 간지러운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었다.
 
그땐 미처 몰랐다. 이 지난한 첫사랑-과외-성적공약이 최종수의 졸업학년까지 이어져올 거라는 건. 거기다 열받기까지 하다. 시험이 어떻게 됐냐고 물을 때마다 이번에도 찢어줬다고 성적표를 척 보이는 모습을 보면 떨떠름한 짜증이 절로 밀려왔다. 이게 다 기상호 때문이다. 포크로 롤케이크를 잘라먹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다시금 쏘아봤다. 갈색 머리통을 문제집에 처박고 한참을 끼적거리던 녀석이 슬쩍 참고서를 들이밀었다. 햄, 이 문제 해설 봐도 이해가 안 돼요. 어디. 이거 해설이 틀렸어. 이거보다 이 값을 먼저 구하고... 이러나 저러나 과외받겠다고 앉은 녀석을 대충 가르칠 순 없었다. 이번에도 최종수의 짝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요원할 예정이었다.
 
 
 
*
 
 
 
"이번 시험에서 성적 떨어지면 제가 햄 애인입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최종수를 보고 기상호는 낄낄 웃다 말았다. 질색하는 표정도 몇년째 보고 있으니 별 생각이 안 들었다. 울 햄은 살짝 정색하는 표정이 잘 어울리는 듯. 얼마전에 희차이랑 만화방에 가서 봤던 순정만화 제목이 생각났다. 마조히스트 메리 미. 무려 스무권이 넘는 시리즈(도대체 내용이 뭘까?)를 척 가리키며 정희찬이 그랬다. 상호, 니다. 니 결혼하는갑다. 기상호는 의미를 알고 정색했다. 내 마조같은 거 아이라니까. 니 금요일마다 그 염병하는게 마조 아니면 뭔데? 사나이 순정이라고 소리쳐봤자 놀림감을 탈출할 가능성은 없으니 아무 만화책이나 턱턱 집어서 이용시간동안 읽고 나온게 지난 수요일의 일이다. 중학교를 같이 나온 정희찬은 기상호의 짝사랑을 알고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엄마친구아들 종수형은 진짜로 엄친아였다. 키크고 머리좋고 잘생겼고 공부 잘하는 형은 아빠 닮아 아는 게 많아 기상호가 모르는 걸 턱턱 가르쳐줬다. 나중에 교수가 될거라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방구석에 박혀 과학동아 매거진 읽기를 좋아하는 재미없는 취향에 함께해주는 종수형이 좋았다. 베란다 창문으로 길게 들어오는 햇살에 색이 짙은 머리카락의 끝이 하얗게 빛날때마다 알게모르게 설레었다. 긴 속눈썹과 까만 눈동자를 보는 것이 좋아서 초딩 기상호는 아주머니가 자주 놀러오라고 하실 때마다 네, 하고 꼬박꼬박 대답을 했으며, 버스 하나를 갈아타는 긴 여정도 기꺼이 감내했다.
 
사는 동네가 한참 먼 형이 중학교를 꽤 가까운 곳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상호는 처음으로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햄이랑 같은 학교 가면 맨날 볼 수 있는 거 아이가? 노란색 테두리가 그려진 검정 블레이저를 입는 종수햄네 학교는 성적 꽤 좋다는 학생들이 시험쳐서 들어간다는 명문학교였다. 그럼 공부를 잘해야겠지. 책장 넘기는 일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던 기상호는 성적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사립중학교에 들어가기엔 저학년때부터 작정하고 준비해온 전국구 학생들을 넘어설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적당히 1지망 2지망 적어 갈 수 있는 인근 중학교에 갔고, 뭘 왕창 실수해서 첫 시험을 망쳤다. 엄마는 우주비행사 될 수 있겠냐고 놀렸는데 그것보다는 햄은 고등학교도 좋은 곳 갈텐데 이래가꼬 갈 수 있겠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중학교에 간 뒤로 부쩍 보는 시간이 줄어든 종수햄은 못 본 새 키가 훌쩍 자라 넉넉했던 교복 어깨선이 살짝 올라가있었다. 가르쳐줄까? 상호가 얼타는 사이 아주머니랑 엄마가 선수를 쳤다. 그래, 종수가 좀 알려주면 되겠네. 공부하는데 방해되는 거 아니야? 중학교 들어가고 상호도 많이 못 봤는데 같이 공부하면 좋지~ 국어시간에 배운 옛날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생사 새옹지마! 그 뒤로 기상호는 금요일마다 최종수에게 과외를 받게 되었다.
 
기상호는 중학생때 벌써 키가 문짝만하게 컸다. 안녕하세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아주머니가 얼굴은 아기같은데 어쩜 이렇게 쭉쭉 큰거냐고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방에 들어가면 햄이 먼저 책상정리를 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벽에 걸린 교복을 볼때면 내가 입어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입겠다고 나선 적은 없지만 내한테 어울릴까 안 어울릴까는 종종 생각해봤다. 햄은 집에선 아무래도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5월의 중턱부터 눈내리는 겨울까지 티셔츠가 반팔이 되었다가 다시 소매가 길어지고 두꺼운 맨투맨이 되는 모습을 전부 보았다. 햄은 중학교가 고등학교로 바뀌기만 한다는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을 따른다고 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나머지 빈자리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꽤 잘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기상호는 침대에 대충 엎어져 한숨을 쉬었다. 같은 학교 가는 게 이렇게 빡세다니. 신문보던 아부지가 바닥 꺼지겠다고 훈수를 뒀다.
 
고등학생이 된 햄은 교복을 새로 맞췄고, 생긴건 비슷하지만 길이도 넓이도 커진 블레이저가 중학교 교복이 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기상호는 이제 2학년이었고 종수햄네 학교의 입학성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비중을 많이 봤다. 1학년은 좀 죽쒔어도 2학년부터 잘한다면 어느정도 만회해볼만하다는 이야기. 결심을 다진 어느날 인터넷에서 웃긴 걸 봤다.
 
고백 공격 이러네. 전교1등 멘탈 부수기? 우리 학교 아들은 못하겠네 2반 반장 남친 있으니까. 전국 중고대학생이 공유하는 대 이벤트 ‘시험’과 관련한 유머자료가 모여있는 게시물이었다. 그중 카톡캡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목 과외쌤이랑 사귀는 법.
 

과외쌤이랑 사귀는 법

 
뭐라노 어이없네 진짜. 종수햄 보여줘야지. 사진을 저장해서 카톡으로 보낼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 볼 건데 직접 보여줘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날은 햄한테 가족 약속이 생겨서 과외를 못갔다. 그 다음 주는 기상호가 까먹었고, 그래서 웃자고 저장해둔 카톡 유머를 공유하게 된 건 그로부터 몇 주 뒤 중간고사가 다 끝나고 성적표가 나온 후의 금요일이 되었다.
 
2학년이 되어 정신 차리고 공부한 결과는 썩 괜찮았다. 비보다 함박눈이 많다고 좋아하며 오답 노트를 정리하던 기상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드립의 계시가 내려진 건 바로 그때였다.
 
 
“햄.”
“어.”
“내 이번 기말에서 성적 떨어지면 내가 햄 남친인거예요.”
“어?”
 
 
만화책 명대사, 인터넷 밈을 생활언어 마냥 툭툭 섞어 뱉는 기상호와 달리 간결한 말투와(이 햄은 말이 많을 땐 많은데 보통은 구사하는 어휘가 엄청나게 단출했다) 담백한 진정성으로 무장한 최종수의 반응은 확고했다. 뭔소리야? 그렇게 말하는 것 마냥 표정이 구렸다. 1.5초 버퍼링 뒤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딱 원하던 반응이라 기상호는 실실 웃었다.
 
 
“햄 이거 몰라요? 과외쌤이랑 사귀는 방법.”
 
 
카톡 짤인데, 이거요. 갤러리를 휙휙 넘겨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덧붙였다. 아 남친이 아니라 애인이네. 근데요 이거 쌤 말투 좀 햄같다 아니에요? 어디가? 시시콜콜한 시비를 하며 사과조각(기상호가 사왔다. 빈손으로 가지 말고 뭐라도 좀 사가라고 어무이가 쥐여준 카드로.)을 사각사각 씹으며 기상호가 주문했다. 이제 햄도 말해요. 뭘. 내가 선창했잖아요, 다음 대사해야죠. 왜 하는데? 햄 말투 똑같아서 웃길 거 같잖아요. 미묘한 표정을 지은 최종수가 하란 대로 했다.
 
 
“개수작 부릴 생각 말고.”
“와 싱크로 쩐다.”
 
 
음성지원 쥑임. 영문을 모르겠다는 최종수를 두고 기상호 혼자만 웃었다. 그러다가, 웃던 입꼬리가 슬쩍 내려갔다.
 
과외쌤이랑 사귀는 법. 내가 쌤 애인이다. 별로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고 있던 어떤 사실을 자각하고만 것이다. 금요일 저녁마다 피시방 만화방 기타 등등 가자는 약속을 다 제치고 지하철 타고 햄네 집에 과외 받으러 가는 이유. 과외는 다 끝나도 나머지 공부다 숙제다 자습이다 하며 뻐기고 있다가 저녁을 얻어먹거나 햄 울 엄마가 이걸로 뭐 사 먹으래요하고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라도 먹고 돌아오던 이유. 참고서 펼쳐들고 문제 푸는 일을 꼬박꼬박 하는 걸 넘어서, 즐겁게 만들어준다고 감탄했던 최종수의 심심한 교수법... 모든 조각이 한 가지 가능성을 맞춰내고 있었다.
 
갑자기 옆자리에서 단어장을 쥐고 있는 햄의 왼팔이 의식되었다. 5월의 중턱을 여름처럼 만들어주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반팔을 입고 있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됐다. 나무 책상은 충분히 넓었으나 반에서 가장 키가 큰 기상호만큼 최종수도 덩치가 있었다. 기상호는 왼쪽으로 슬쩍 몸을 붙여 피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짤방 하나가 계기가 되었다는 웃기지도 못할 짝사랑이 시작됐다.
 
 
 
 
햄이 남중 남고 가서 다행이다. 지인짜로. 물론 기상호도 남자지만, 그리고 잘난 인간 좋아하는 데는 남녀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적어도 공학 다니는 기상호처럼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다 챙기는 뭉실뭉실한 분위기에 휩쓸릴 일은 없을 거 아닌가. 반장이 돌린 우정 빼빼로를 까먹으며 중얼거리자 정희찬이 대충 대꾸했다. 그래 좋으면 말을 하지 와. 기상호는 아몬드 빼빼로를 버적버적 씹으며 답했다. 니 고백 공격이라고 모르나? 우리 햄 한국대 가야 돼서 성적관리 잘 해야 된다. 학교 다니는 동안엔 안 되지. 중딩이 하는 소리치곤 제법 웃긴 내용인데 듣고 있는 정희찬도 중딩이라 그냥 따라 감탄했다. 기상호 완전 로맨티스트네. 당연하지, 사나이 기상호 로맨틱 빼면 시체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짝사랑을 포장하며 책가방을 챙겨 독서실로 향했다.
 
그동안 금요일마다 최종수에게 과외(라기보단 거의 같이 만나 각자 공부하는 자습의 성격이다)를 받으러 간 기상호는 중간기말이 될 때마다 ‘이번에 성적 떨어지면 내가 햄 애인이다’ 드립을 쳤다. 그러면 최종수도 꼬박꼬박 답변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카톡프사 한 장 없는 것까지 싱크로율 대박이란 생각이 드는 한편 속절없이 간질거렸다. 개수작이라뇨,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까지는 넘어가지 못했다. 거기까지 가면 다음 대사도 쳐야 할 것 같으니까.
 
어쨌거나 드립은 드립이고 기상호는 계속해서 공부를 했다. 사랑은 포장할 수 있어도 성적표는 포장이 안 되니까. 이번에는 꼭 햄이랑 같은 학교를. 기상호가 목표로 하는 학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난색을 표했지만 (정희찬: OO고? 거기 자사고 아이가? / 태성햄: 거기 OO중 안 나왔음 면접도 봐야 할 텐데, 되겠나? / 다은햄 : OO고 앞에 떡볶이 맛집 있지 않음?) 달밤에 햄과 같은 고등학교에 미친 기상호는 공부의 폭주를 일으킨 상태였다. 와일드 기상호, 라이엇 기상호, 초 기상호 모드.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성적이 올랐다. 우선 부모님이 대단히 좋아하셨고, 덕분에 2학년이 되면서 하교 시간이 늦어진 햄과의 과외를 이어가기 위해 (물론 햄도 합의한 사항이었다) 금요일마다 학교 인근 스터디 카페로 태워주셨다.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동안 기상호는 내내 최종수의 교복 입은 모습을 열심히 보게 되었다. 연노란색 니트를 걸친 셔츠였다가 반팔이었다가, 다시 소매가 길어졌다가 조끼와 블레이저를 전부 입는 것을 전부 보았다. 사이사이 생활복이나 사복-여름의 반팔 티나 겨울의 후드티 같은 거-이 섞이긴 했으나 한 해 간의 교복 차림을 다 본 셈이다. 소매가 살짝 짧아져 손목이 보이는 것도 고개를 숙이면 헐겁게 풀어둔 학생 넥타이의 잠금줄이 슬쩍 보이는 것도 전부 설렜다. 이번에는 꼭 햄이랑 같은 교복을. 조용한 방 하나를 통째로 빌려 한두 시간 정도 바짝 기상호의 공부를 봐주고, 남은 시간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나 내며 자습을 하다 돌아오는 시간이 이어졌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둔 기상호는 이번에도 결의에 찬 멘트를 던졌다.
 
 
"이번 시험에서 성적 떨어지면 진짜 내가 햄 애인이다.“
”어이가 없네.”
 
 
몇 달 뒤 기상호는 또다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혹시 몰라 떠벌려두지 않은 관계로 종수형은 아무것도 모르고 너 고등학교는 어디 가느냐고 심심한 안부나 물어왔다. 기상호는 별말은 하지 않고, ‘햄이 제대로 드립을 안 쳐줘서 아무 데나 가려고요’고 이해를 바라지 않는 트집만 잡았다.
 
 
*
 
 
그래서, 다시 오늘. 노란색의 포인트 컬러가 인상적인 OO고등학교 교복과 달리 새파란 진청색이 멋스러운 지상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기상호는 고전 문학 파트 빈출 문항마다 형광펜을 죽죽 긋고 있는 중이다. 햄이랑 같은 학교가 아닐 뿐이지 지상고는 공부로는 8학군에 비비는 명문으로 굉장히 좋은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기상호는 그중에서도 상위권. 목표 달성도-햄이랑 같은 학교 가기-만 보자면 실패한 역사였지만 결과적으로 탄탄한 밑거름이 되었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 언젠가의 꼬장 이후로 최종수는 꼬박꼬박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문법을 지켰다. 오늘은 한 문장이 더 붙었다. 야, 이거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기상호는 흐흐 웃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성적 잘 나온단 말이에요."
"기분 나쁘니까 다른 걸로 해."
"이만한 게 없든데요, 완전 승리의 주문임."
 
 
그 말은 사실이다. 기상호에게 이 대화는 언제나 승리의 주문이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라며 표정을 구기는 최종수를 생각하면, 참고서를 내려다볼 때 보이는 긴 속눈썹이나 날렵한 콧대, 숱이 많은 검은 곱슬머리, 살짝 어두운 피부와 볼펜이 무척 작아 보이는 큰 손, 이따금 저를 바라보는 눈빛과 문제를 설명해 주는 목소리를 매일 보고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졸리고 피곤해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다가도 주섬주섬 일어나 책을 펼 기운이 났다. 바깥에선 햄이 어떻게 지내고 사는지 알고 싶었다. 요즘 세상에 핸드폰도 다 걷어내지만 예체능 수업을 주요 과목으로 대체하지 않으며, 점심은 맛이 없지만 석식에는 간식까지 챙겨준다는 학교에서 키가 크다는 이유로 창가 쪽 끝자리에 앉아 오후 시간이면 책상 위로 햇빛이 쏟아져내린다는 최종수의 일상이 궁금했다. 중학교도 실패, 고등학교도 실패했지만 다행히 기상호에게는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다.
 
겨울이 지나면 종수햄은 대학에 간다. 이변이 없는 한 목표한 대학과 학과에 갈 것이다. 최종수가 가고자 하는 길은 꽤 오래전부터 분명했으므로 이젠 기상호만 분명히 정하면 됐다. 초등학교 시절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던 기상호에게는 더욱 많은 선택지가 갖춰졌다. 생기부와 자소서를 채우겠답시고 이것저것 해본 활동 속에서 나름의 적성도 찾았다. 남은 2년동안 천천히 생각해도 최종수를 2년이나 더 볼 수 있다. 중고등학교와 달리 최종수가 가려는 대학은 4년이나 다녀야 졸업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아무래도 지금보다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거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포크로 롤케이크를 잘라먹으며 생각한다. 내 대학 갈 때까지요. 고백 공격이란 거 생각해 봤는데요, 내한테도 데미지가 클 거 같더라고요. 쪼매 더 준비했다가 해볼께요.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타이밍 좋게 째려보는 최종수를 마주보며 히히 웃었다.
 
기상호는 최종수가 좋다. 금요일마다 시간을 내서 두 시간씩 공부를 봐주는 것도 일 년 내내 교복이 잘 어울리는 것도 이런 거 왜 하냐면서도 꼬박꼬박 카톡 대화를 맞춰주는 햄이 좋다. 그러니까 햄한테 꼭 써먹어야지. 개수작이라뇨,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다 주고받으면 그때 물어볼 것이다.
 
햄, 내 시험 잘 보면 왜 그렇게 짜증 낸 거예요?
‘어 그래 축하해’하고 떨떠름한 말투로 노트 펴고 오답노트 하라고 한 이유가 뭐였어요?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니까 나중에 물어봐야지.
 
 
“햄, 이 문제 해설 봐도 이해가 안 돼요.”
“어디. 이거 해설이 틀렸어. 이거보다 이 값을 먼저 구하고...”
 
 
 
 
 
 
 
 
 
 
+ n년 후


오전 11:57 - 자기야 오고 있어?

 
도착했어 어디야 - 오전 11:57
 
 

오전 11:58 - 아
오전 11:58 - 아니죠
오전 11:58 - 다시다시
오전 11:58 - =======절취선=======
오전 11:58 - 자기야 오고 있어?

 
진짜 어이없네 - 오후 12:00

 
 오후 12:00 - ㅇㅋㅇㅋ
 (따봉하는 강아지 이모티콘)
 

이거 언제까지 할건데?? - 오후 12:00
 

 오후 12:01 - 쪼매만 더요
오후 12:01 - 내 중딩때부터 로망이었단 말예요
 

로망 삼을 게 그렇게 없냐? - 오후 12:01
진심 어이없네 - 오후 12:01
과외쌤이랑 사귀는 법이라며 - 오후 12:02
이제 사귀니까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니야? - 오후 12:02
 


 

 
 
 
<이하 코멘트>

더보기

ㅠ 보자마자 헐~! 너무 귀여워~! 하고 후다닥 써보았습니다.............. 글이라고 하긴 어렵고 걍 장문썰같지만?! 저는 즐거웠으니 만족합니다. 원본도 좋아하는 썰인데 좋은 거 + 좋은 거 = 정말 좋은 거네요 ㅠ 메이저의 축복... 재밌는 썰 써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설정 관련〉

- 최세종씨는 학계 최고 권위자... 킹왕짱 박사입니다. 교수로 재직중. 분야는 자유롭게 생각해주세요.

- 장도고는 공학이라 학교 이름을 익명처리 했습니다. 가상의 모 학교로 생각해주세요. 사실 걍 공학 가도 ㄱㅊ을 거 같은데 이편이 웃길 거 같아서 이렇게 됐습니다.

- 편의상 이래저래 믹스된 부분이 많습니다만 (상호가 지상고다니는 거 보면 배경 부산인데 종수는 서울말 등) 2차가 다 그러려니 갑한민국이려니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마조히스트 메리 미?

오늘 포타제목추천해주는 진단?깨유를 돌렸는데 나온 이름이 너무 웃겨서 차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